미국2대 대통령 존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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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아담스는 조지 워싱턴의 뒤를 이은 미국의 2대 대통령이자 초대 부통령입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변호사였고 상당한 독설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학식이 풍부했고 사려가 깊어 정치인보다 정치철학자로 더 기억됩니다. "국가와 국민은 갈등이라는 용광로의 불꽃을 거쳐서 탄생한다."는 믿음을 가진 미국 2대 대통령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1.존 애덤스의  정치입문과 행적

존애덤스는 1735년 10월 30일 매사추세츠주의 브레인트리에서 태어나 1755년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됩니다. 그는 제1,2차 대륙회의에 대표로 참가하여 미국의 독립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독립전쟁 중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외교사절로 파견되었고 1785년에는 주영공사로 재직하였습니다.

 

존 애덤스는 미국이 독립선언문을 작성할때 참여했던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이기도 하였으나 그 당시  미 대통령선거는 2등한 후보에게 부통령직을 주었습니다. 조지 워싱턴 행정부에서 부통령직을 맡습니다. 추진력, 지성, 명예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두 번의 부통령직은 매우 곤혹스러웠던 시간이며 그의 아내에게 "나의 조국은 인간이 상상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일을 나에게 맡겼다."라며  그가 맡은 직책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애덤스가 취임할 당시 미국은 영불전쟁의 여진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공해상에서 선박운항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정파간 다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애덤스 정부는 당시 양국 간 특사와 교역이 끊겨있던 프랑스에 외교적 노력을 집중하면서 세명의 사절단을 파견하였으나 1788년 봄 프랑스가 엄청난 뇌물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협상을 거부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애덤스는 이 사건을 아주 모욕적으로 느껴 의회에 보고하면서 프랑스 측 관련자들의 이름을 실명을 적는 대신 X, Y, Z로만 표시하였습니다.  애덤스는 국민적 공분을 부추기면서 그 수위는 더욱 높아졌고 대통령이 모습을 보일 때마다 전 국민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의회는 세척의 프리깃함을 포함한 선박들을 건조하고 예비병력 동원안을 승인하고 국내에 잠입한 외국인 첩자들을 국외로 몰아내면서 친공화파 언론인들의 비판을 잠재우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애덤스는 선전포고는 하지 않았지만 프랑스와 교전이 시작되었고 1800년에 이르러서야 미국의 상선들과 전함은 해상로를 확보하게 됩니다. 프랑스 해군과의 전투를 통해 대승을 거두었지만 미국인들은 전쟁을 점차 지지하지 않게 됩니다. 이때 마침 프랑스로부터 미국 측 특사를 받아들이겠다는 정중한 의사가 전달되었고 오랜 시간 협상을 통해 준전시상태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애덤스 행정부가 프랑스에 보낸 평화사절에 대해 해밀턴주의자들은 극심하게 반대를 했고 애덤스의 연방파는 형편없이 분열되고 재퍼슨의 공화당은  효과적으로 결집되어 있었습니다. 1800년대 대선에서 제퍼슨에게 패배하였고 선거 직전 1800년 11월 1일 새로운 수도에 도착하여 백악관 내에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존 애덤스는 토머스 제퍼슨과 사이가 아주 안 좋았습니다. 애덤스는 제퍼슨이 편하게 임기를 시작하게 두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덤스는 임기 종료 바로 전날 연방대법원 판사들을 전부 연방주의자로 앉혀버리면서 매버리 대 메디슨 사건의 발단이 욉니다. 대법원장은  애덤스와 친했던 존마샬이 맡았으며 토머스 제퍼슨은 임기 내내 사법부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엄정하게 중립성을 지키던 미국 법원의 전통이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2.존 애덤스의 은퇴

은퇴 후 애덤스는 퀸시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여생을 보냅니다.  평생 토마스 제퍼슨은 정적으로 얽히고설켜 지독하게 사이가 안 좋았지만 이곳에서 화해도 하고 서신도자주 교환합니다. 1826년 7월 4일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애덤스는 토마스 제퍼슨에게 "그는 건재할것이..."라며 유언을 끝맺지 못했고 토마스 제퍼슨 역시 몇 시간 전에 자신의 저택에서 운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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